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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름 - 내가 지은 내 이름 이야기

. 6 min read . Written by 봄을기억해

나를 부르는 호칭, 나를 의미하는, 모두에게 나라는 사람을 '나'라고 인식하게 하는 것. 이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름이라는 건 태어날 때부터 이미 내 것이었다. 세상과 나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어릴 적에도 나는 내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내 이름은 늘 내 이름 같았다. 거기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종교 같은 면이 있었다. 앞으로도 내 이름은 여전히 나를 지칭하는 것일 거라는 막연한 믿음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아는 사람이 사주를 이유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고 얘기했을 때, 나는 거기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막상 내가 그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같은 상황이 된다 해도 이름을 바꾸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이름은 내 그림자처럼 평생을 함께해온 사이 아니던가? 영화에서 이름 대신 숫자로 부르는 것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거나,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야 비로소 존재감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이름은 개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소중한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관점에서 모태이름(?)을 벗어나 나를 지칭할 두 번째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좀 더 스스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마치 자화상을 그려내는 것처럼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 '나'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한낯 별명에 불과할지라도.

부캐로써 진지하게 내 두 번째 이름을 고려해보게 된 것은 어느 영화토론 모임에서였다. 지금은 없어진 '담화관'이라는 유료 서비스였는데 특이하게도 모두 자기소개를 할 때 별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식이었다. 첫 모임으로 예약된 공간에 들어서서 어색한 공기를 뚫고 자리에 앉았을 때 담화관의 파트너라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는 모두 별명으로 부르거든요. 자신을 표현할 별명을 적어주세요." 그는 명함보다 조금 큰 크기의 속지와 큼지막한 유성매직을 내게 건네 왔다. 시작 시간까지는 여유가 좀 있던 터라 고민을 거듭한 끝에 별명을 툭 적어냈다. 그렇게 모두가 자기 자리에 푯말을 세우듯 별명을 새겨놓고는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던 침묵의 시간들을 기억한다. 서로 처음 보는 이들이 빙 둘러앉아 영화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자리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각자 자기가 원하는 만큼만 자신을 소개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적은 별명과 별명값(?)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으며 영화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져들었다.

어떤 모임 때는 먼저 오신 분이 '대리'라는 별명을 적어놓았는데, 나중에 오신 분이 '인턴'으로 적어두셔서 모두가 빵 터진 적이 있었다. 두 분 다 별생각 없이 자신의 직급을 적어둔 덕분에 사회생활 컨셉으로 엮이는 영화토론이 특히 흥미진진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외에 부를 때마다 왠지 내키지 않았던 '임금'님이 있었고, '치즈'라던가 '까눌레' 같이 먹는 것을 의미하는 별명도 있었다. '뚜벅이'나 '백곰' 같이 캐릭터가 명확히 느껴지던 별명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무래도 좋다. 모두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별명들이니까.

거기서 내가 쓴 별명은 '봄'이었다. 정확히는 '봄을기억해'의 줄임말이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름이기도 하다. '봄을기억해'는 내가 본 것을 (사진으로) 기억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봄 같은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 기억한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인생의 봄날 같은 순간은 마땅히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법 아니던가? 나는 그런 순간이 내 눈에 보일라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카메라를 꺼내 들곤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사진을 찍어온 덕분에 지인들의 사진을 찍어줄 때가 종종 있었고, 가끔은 결혼식의 스냅사진을 찍어주기도 했을 만큼 사진은 내 인생에서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다.

본 것을 담아내는 것은 사진만이 아니라 글도 마찬가지여서 글을 쓸 때면 과거의 어느 순간을 회상하고 있는 나를 본다. 글로 쓴다는 것은 어떤 순간을 영원하게 붙잡아두는 일이라는 점에서 사진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이름 그대로 내가 본 것을, 봄날 같은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이고 싶다. 그렇게 브런치에 쓸 이름은 '봄을기억해'가 되었다.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 기억하는 것들이 많았으면 한다. 그저 흘려보내기보다 붙잡아두고 싶다. 기록으로 많이 많이 남겨낼 수 있기를.